****배드민턴

‘셔틀콕에 미친 사나이’[펌]

까망도올 2008. 6. 27. 13:24

- ‘셔틀콕에 미친 사나이’ 김학석

 

배드민턴은 대표적인 ‘약수터(공원) 운동’이다.

1960년대 초창기 배드민턴 대표선수들은 휴일이면

약수터와 공원을 찾아다니며 배드민턴을 보급했다.

2~3명이 조를 짜 서울 장충단공원, 남산약수터,

인왕산, 효창공원, 덕수궁 앞은 물론이고 심지어

창경원에서도 강습을 벌여 동호인 수를 늘렸다.

여름엔 한 달 동안 반바지 차림으로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1970년 전국 처음으로

당시 사회 유명인사가 많았던 서울 장충단공원

동호인이 모여 장충클럽이 창립됐다.

1971년엔 YMCA클럽 부산클럽 충주클럽이 탄생했고

1972년엔 개운산클럽 광주클럽 서귀포클럽이 뒤를 이었다.

 

마침내 1978년엔 한국사회인배드민턴연맹이 창설됐고

이는 새마을배드민턴 중앙연합회(1981년)-

한국사회인배드민턴 중앙연합회(1986)

-국민생활체육 전국배드민턴연합회(1991)로

이름을 바꿔가며 오늘에 이르렀다.

전국 5000여 클럽에 동호인 300만명이 즐기는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 배드민턴 수준이 오늘날과 같이

높아진 것은 20여년에 불과하다.

1934년 세계배드민턴연맹이 창립됐지만

대한배드민턴협회는 1957년에야 창립됐으며

1962년에 이르러서야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가 됐다.


1962년 자카르타아시아경기대회 땐 선수까지 선발했지만

망신만 당한다며 파견을 취소했다.

1966년 방콕아시아경기 때는 남녀 각각 2명씩만 참가해

단체전(4명) 때는 단장과 임원이 선수로 등록해 뛰었을 정도다.

1970년 세계남녀 선수권대회인 토마스컵과 우버컵 극동지역

예선에서는 일본에 0-9, 0-7로 패해 대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1978년 방콕아시아경기에서는

한국이 19개 전 종목 중 18개 종목에서 고루 메달을 따내

일본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는데

유일하게 배드민턴에서만 메달이 1개도 없었다.


한국 배드민턴은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이 없었더라면 결코 오늘과 같은

생활스포츠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은

전국 산하조직에 배드민턴 보급을 지시했다.

배드민턴이야말로 도시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 생활스포츠라고 판단한 것.


1981년 3월29일 황선애의 전영오픈 배드민턴

여자단식 우승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황선애의 깜짝우승은 당시 세계 배드민턴 변방이었던

한국을 일약 배드민턴 강국으로 만드는 전환점이 됐다.

여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배드민턴 붐을 불러일으켰다.


전경환씨는 자신이 앞장서 배드민턴을 배웠다.

동호인이 많이 모이는 체육관 약수터 공원 등을

찾아 그들과 직접 게임을 하기도 했다.

도지사 경찰서장 기관장들에겐 라켓을 선물로 주며

해당 단체나 직장에 배드민턴부 설치를 권유하기도 했다.

배드민턴이 전국에 급속도로 퍼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물론 ‘셔틀콕에 미친 사나이’ 김학석(55·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겸 전무이사)씨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4년 대한배드민턴협회 경기이사로 참여한 이래

30년 동안 한국 배드민턴에 모든 것을 바쳤다.

사업도 가정도 돈도 인생도 모든 것을 바쳤다.


경기 이천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배드민턴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돈을 썼다.

1974년 협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아버지에게

부회장을 맡도록 설득해 돈을 쓰게 했고

자신은 대대로 내려온 양조장을 팔아 대표팀 경비로 썼다.


또한 자신의 잘 나가던 사업도

배드민턴을 위해 과감하게 정리했다.

당시 배드민턴 관계자들은 “김학석이 아버지 재산의

반을 배드민턴에 쏟아 부었다”고 말했다.

오죽하면 ‘한국 배드민턴은 김학석

부자가 키웠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1974년 김학석씨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일본 배드민턴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10년만 기다려라.

너희들을 무참하게 꺾어줄 테니…”라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틈만 나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쓸 만한

꿈나무들을 발굴해 아낌없이 지원했다.


마침내 7년 만인 1981년 1월 황선애가 그의 꿈을 이뤘다.

일본 오픈에서 세계 최강이던 도쿠다 야스코를

2-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3월엔 영국 오픈까지 휩쓸어버린 것.


이런 김학석씨가 2000년 9월 시드니올림픽이 한창일 때 쓰러졌다.

병명은 심장판막 이상과 동맥경화로 인한 심장혈관 이상.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져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배드민턴 때문이다.

사흘 후면 그 중요한 시드니올림픽 배드민턴 결승이 열린다.

우리 선수들이 뛰는 걸 보고 수술하고 싶다.

사흘만 늦춰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물론 가족들도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냐”며 할말을 잊었다.

결국 그는 결승전을 보지 못하고 20시간이나 걸린

대수술을 받았지만 그의 배드민턴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